세월이란 참으로 묘한 연금술사여서, 지나간 순간들을 어느새 영원의 결정체로 빚어놓는다. 문득 오래된 서랍을 열듯 기억의 문을 열면, 그 시절 우리의 모습이 빛바랜 세피아 톤의 사진처럼 아련히 피어오른다.
설악, 그 여름의 서곡
30도를 훌쩍 넘겨버린 7월의 태양, 뙤약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던 설악의 어느 오후였다. 대청봉은 아득한 저 너머에서 구름을 이불 삼아 졸고 있었고, 나는 그 장엄한 풍경에 취해 어설픈 노래 몇 가락을 읊조렸다.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민망한 목청이었으련만, 젊음이란 그런 부끄러움마저 낭만으로 포장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그런데 여인은 웃음을 잃었다고 했다. 내 노랫소리가 싫어서라고.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당신의 그 삐침마저도 사랑의 또 다른 언어였음을. 설악의 바람은 우리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무언가를 속삭였고, 우리는 그 바람결에 실린 서로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텐트 안의 우주
해수욕장의 밤은 낮과는 또 다른 밀담의 세계로 분위기를 만들어주며 서로에의 공간만을 열어주었다.
누가 엿듣기라도 하듯 내밀한 작은 속삭임으로 서로를 확인하는 우리 목소리를 저 멀리 파도 소리는 잔잔하지만 훼방꾼되어 어둠 속에 출렁였고, 별들은 검푸른 캔버스 위에 은빛 물감을 뿌려놓은 듯 절정을 이룬다.
작은 텐트 안, 단둘만의 시간.
태어나 처음으로 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만든 우리만의 공간. 그 좁디좁은 천막 안에 우리는 하나의 우주를 건설했다. 서로의 숨소리가 닿을 만큼 가까이,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히. 세상 모든 연인들이 꿈꾸는 낭만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처음으로 실감했던 밤. 파도가 밀려왔다 물러가기를 반복하는 사이, 우리의 인연도 조금씩 깊어져 갔다.
불암산의 달빛 아래
그러나 사랑이 어찌 달콤함만으로 이루어지랴.
불암산의 밤, 우리는 티격태격 다투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그때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안타까운 장면들. 달빛은 무심히 우리를 내려다보았고, 산바람은 우리의 언성 높아짐에도 아랑곳없이 제 갈 길을 갔다.
당시에는 아슬아슬하기만 했던 그 순간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던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의미없는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위태로움마저도 젊음이 빚어낸 아름다운 열정의 산물이 아니었나 생각이든다. 사랑은 그렇게 작은 균열들을 메워가며 더 단단해지는 것이었다.
도고 온천, 첫 여행의 기억
당신과 내가 처음으로 함께 떠났던 곳, 도고 온천.
따스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연인이 되어있었다. 너무 다정해서, 애틋해서 탓일 지경이었다. 다툴 일을 찾아 헤매는 것조차 하나의 유희가 되었으니. 싸워도 될 일을 굳이 말로 풀어내던 그 시절, 우리는 서로에게 온전히 스며들어 있었다.
"행복"이라는 단어로는 턱없이 부족했던 그 순간들. 아니, 어쩌면 인간의 언어란 본래 그런 벅찬 감정을 담아내기엔 너무 좁은 그릇인지도 모른다. 온천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처럼, 우리의 사랑도 모락모락 피어올라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첫 시비, 그리고 침묵
우리는 도대체 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첫 시비를 내가 걸었다.
과거 교제하던 여자 이야기로 시작된 그날 밤. 질투라는 이름의 작은 불씨가 술이라는 기름을 만나 활활 타올랐다.
그 뒤의 일은... No Comment.(대부분 연인들이 그렇듯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짧은 질투의 과정) 기억의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자물쇠를 채워버린 그 밤. 생각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그 밤.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밤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더 깊이 서로를 알아갔다. 상처는 때로 사랑의 깊이를 재는 자가 되기도 하는 법이니.
아직 걷지 못한 길
언젠가 한번 광릉의 숲길을 걸어야겠다.
울창한 수목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낙엽 밟는 소리, 새들의 지저귐. 무척이나 멋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난 시절의 파노라마가 펼쳐질 것만 같은 상상을 해서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곳을, 당신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거닐고 싶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 고즈넉한 숲에서, 우리의 사랑도 영원을 닮아갈 수 있을까.
청평사에도 다시 한번 찾아야겠다. 소양강의 깊은 물을 헤치고 오르던 그 계곡, 물보라를 일으키며 나아가던 배 위에서 느꼈던 설렘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 그 순간의 느낌이, 열정이 다시 새록새록 피어날까? 아니, 어쩌면 세월이 덧입힌 그리움의 빛깔이 더해져 더욱 깊은 감동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일 아니겠는가!
영원으로 가는 길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설렘에 잠 못 이루는 스물 살 꿈도많고 탈도 많았던 연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가 나눈 순간들은 시간이라는 강물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보석이 되었다.
순간은 영원을 창조한다.
우리가 함께한 그 모든 순간들—뙤약볕 아래의 설악도, 파도 소리 가득한 텐트 안도, 달빛 아래 다투던 불암산도, 다정함이 넘쳐흐르던 도고 온천도—그 모든 것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당신과 함께여서, 그래서 영원이 되었다.
—청춘의 어느 날,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날들을 기억하며....


